가수 계은숙의 어린 시절과 더불어 일본에서의 행적이 흥미롭네요.
한때 내연남때문에 방송 활동에 펑크를 냈고, 또 한국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죠.
특히, 계은숙 야쿠자와 연관된 소속사때문에 수많은 루머로 고생하기도 합니다.
# 목차
* 계은숙 어린 시절
* 계은숙 아버지의 불륜으로
* 계은숙 내연남 때문에
* 계은숙 일본 인기와 인지도
* 계은숙 귀화 거부하면서(계은숙 국적 한국)
가수 계은숙(본명)은 1962년 7월 28일 충청남도 서산에서 태어납니다(계은숙 고향 서산). 올해 54살이죠(계은숙 나이).
(계은숙 키 몸무게) 161cm, 45kg
(계은숙 학력 학벌) 답십리 초등학교, 성수여자중학교, 천호 여자상업 고등학교 졸업
(계은숙 프로필 및 경력) 1977년 럭키샴푸 CF모델로 데뷔
이후 1978년 '유니버설레코드'에서 가수로 데뷔했고, 히트곡 '노래하며 춤추며', '기다리는 여심', '나에겐 당신밖에', '다정한 눈빛으로' 등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1985년 일본의 유명 작곡가 하마 케이스케의 사사로 '오사카 보쇼쿠'를 발표하면서 일본에서 데뷔하게 됩니다. 이후 계은숙은 <すずめの涙>(스즈메노 나미다), <夢おんな>(유메 온나), <酔いどれて>(요이도레테), <真夜中のシャワー>(마요나카노 샤와), <ベサメムーチョ>(베사메무초) 등으로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특히, NHK의 홍백가합전에 1988년부터 1994년까지 7년 연속 출연하는 진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 계은숙의 일본내 인기를 잘 알려주는 사건이었죠.
(그 외에도 일본유선대상, 일본가요대상, 각종 음악제의 여러 상들을 수상함)
계은숙 젊은시절 사진
* 계은숙 어린 시절
계은숙의 어린 시절은 무척 불우했습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가 명동 증권가에서 작은 매점을 운영하면서 계은숙과 그 언니를 키우던 싱글맘 가정이었죠.
계은숙: "어머니가 작은 매점을 운영하셨는데, 나는 열두살때에 우산이나 신문을 들고 행상(길거리에서 물건을 팜)을 하면서 어머니를 돕기도 했다."
계은숙: "원래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신 줄만 알고 자랐다.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들을 수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중학교때 어머니와 친하신 분으로부터 아버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동안 아버지 존재에 대해 숨긴 어머니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이후 한참을 방황했다."
계은숙: "그러다가 은사님을 통해서 '계씨 종친회'를 알게 됐다. (선생님이) 편지를 써보라고 해서 써봤는데, 결국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한 다방에서 만났는데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계은숙: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몰래) 만나게 했다. 하지만 상황은 내 생각과는 너무나 달랐다. 어머니에게 굉장히 혼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계은숙 과거 사진
* 계은숙 아버지의 불륜으로
계은숙: "결국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려주셨다. 6.25 피란 이후에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본부인이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몰랐던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계은숙: "결혼 이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헤어지셨던 것이다."
계은숙: "어머니가 당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직 아이이고, 내가 여자로서 받은 아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라고... 결국 나는 딸로서 어머니 곁을 지키고 싶었다(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즉, 계은숙 아버지가 어머니를 속이고 결혼을 했던 것이네요.
계은숙이 어른들의 사정을 몰랐던 나머지 어머니에게 실수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 계은숙은 아버지와의 인연이 끊기고,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계은숙 젊었을때 사진(계은숙 리즈시절 사진)
* 계은숙 내연남 때문에
처음 CF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한 계은숙은 곧 이어 가수로 전업합니다.
데뷔 초부터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일본에서 활동할 때도 계은숙 특유의 장점이 됩니다.
하지만 여러번 방송 출연을 펑크내면서 방송사(MBC와 KBS)에서 2개월간 출연금지 조처를 취했고, 전국공연단체 연합회에서는 계은숙의 무기한 출연정지를 결의하기도 하는 등, 계은숙의 방송 생활은 그리 순탄치가 않았죠.
이 이유는 바로 계은숙의 내연남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계은숙: "당시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 집안에서 나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집안의 자제였다. 그런 집안에서 딴따라(가수)인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계은숙 명문가 자식)
계은숙: "결국 결혼 3일 전에 그 남자가 가족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돌연 사라졌다. 하지만 배신당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냥 나를 지켜줄 수 없는 남자로 이해하고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가수라는 직업을 이해해주지 않아서 상처가 컸다."
계은숙 젊은시절 사진
* 계은숙 일본 인기와 인지도
계은숙: "당시에 내 상처도 컸지만 어머니도 그 일로 마음을 많이 다치셨다. 더 이상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다. 당시 그 일때문에 패닉 상태에 빠져서 방송 펑크도 자주 내다가 출연정지를 당했다. (한국에서는) 가수로서도 여자로서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에서 '살아야겠다는 마음'과 '상황의 괴리감'에 무척 괴로웠다."
계은숙: "그때 마침 국제가요제에서 관계자가 일본 진출을 제의했다. 더 이상 불효하기 싫어서 일본에 건너 갔다. 일종의 도피였다."
1984년 일본으로 건너간 계은숙은 일본의 유명 작곡가 하마 케이스케에게 사사하여 이듬해 일본에서 데뷔하게 됩니다. 첫곡 '오사카 보쇼쿠'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의 유명한 가요 프로그램인 홍백가합전에 7년 연속 출전하는 진기록을 세우고, 각종 노래관련 상을 휩씁니다.
또한 일본의 전 총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계은숙의 팬클럽 회장을 맡기도 하는 등,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계은숙: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일본 총리로 재직할 당시에 한국 대통령이 방일하면 공식 만찬에 초대해주셔서, 내가 노래하러 (총리 관저에) 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한국 노래를 좋아했다. 날 볼 때마다 그 말씀을 하셨다."
계은숙: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결국 내 노래를 무척 좋아해서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공무원들이 만든 팬클럽 회장을 맡으신 걸로 안다."
즉, 전국적인 규모의 팬클럽이 아니라, 단순히 공무원들끼리 만든 계은숙 팬클럽 회장이었네요.
아무튼 당시 계은숙의 일본에서의 인기는 굉장했죠.
* 계은숙 귀화 거부하면서(계은숙 국적 한국)
아무튼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던 계은숙이었지만, 2가지 이유로 '아슬아슬한 일본에서의 성공 스토리'를 이어갑니다.
첫번째는 바로 국적문제였죠.
원래 계은숙이 큰 인기를 얻게 되면서 일본에서는 계은숙의 귀화를 종용했습니다.
하지만 계은숙은 끝까지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일본 대중 및 연예계 관계자들에게 미운 털이 박힌 상태였죠.
계은숙: "일본에서 활동할 때도 늘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무대에 섰다."
실제로 한국 국적 및 한국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활동하던 계은숙때문에 일본 극우들이 공연장 주변에서 시위를 한 적도 많았습니다.
(참고로 일본 연예계들은 야쿠자와 연계된 경우가 많음. 계은숙도 야쿠자 문제에 대한 루머가 굉장히 많았고, 결국 전 소속사 때문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됨. 밑에서 추가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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