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웹툰작가 김풍은 1978년 12월 12일 태어납니다. 올해 40살이죠. (웹툰 김풍 작가 나이)
김풍 고향은 서울로 추정이 됩니다. 어릴 때 서울 인헌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이죠.
김풍 본명은 김정환인데, 김풍이란 필명은 젊은시절 나이트클럽을 많이 다니면서 만들었던 별명입니다.
김풍: "대학교 1학년 때 나이트클럽에서 댄스 대회를 나간 적이 있었다. 당시 ‘순풍산부인과’라는 시트콤이 유행이었던 시절이었다."
김풍: "그래서 당시 나이트클럽 웨이터 형이 ‘순풍산부인과’의 풍을 따서 김풍이 괜찮겠다고 제안했다. 어감도 좋아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 덕분인지 1999년 댄스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게 되었다."
(김풍 키) 약 178cm로 추정
(웹툰 김풍 학력 학교) 인헌초등학교 졸업
홍익대학교 애니메이션학과 중퇴
(김풍 프로필 경력) 2002년 폐인가족으로 데뷔
2003년 하나포스 광고에 출연
2003년 캐릭터 회사 사장
영화기자로 1년간 재직
2005년 연극배우로 약 8개월간 활동
2006년 폐인가족2, 내일은 럭키곰스타 발표
2009년 영화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에 조연으로 출연
2012년 올리브쇼 출연
2013년 더 지니어스 게임의 법칙 출연, 웹툰 찌질의 역사 시작
2014년 냉장고를 부탁해 출연
2015년 주먹쥐고 소림사 출연
2016년 SNL 코리아
2017년 은밀하게 위대하게
만화가 김풍은 분명 찌질함에 대한 웹툰을 그려서 성공했는데, 돈을 많이 벌게 되면서 더 이상 찌질하게 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성공시킨 찌질이라는 영역을 계속 활용했고, 이것이 그의 재기의 발판이 되었죠.
김풍이 굉장히 젊은 나이에 어떻게 성공했는지, 그리고 처음의 실패 이유와 나중에 재기 성공 원인까지 함께 짚어봅니다.
먼저, 김풍 그가 꼽는 성격의 섬세함입니다.
김풍: "어릴 때부터 난 내성적인 성격이었어요. 오늘은 엄마가 기분이 좋나 안 좋나 살피고, 기분이 좋은 것 같으면 이런 얘긴 꺼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고..."
이렇게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이 나중에 그가 웹툰이나 방송을 할 때 큰 도움이 됩니다. (밑에 추가 설명)
또한, 김풍에게는 어릴 때부터 만화에 대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김풍: "사실 어릴 때의 꿈은 화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연금술 책을 보며 무언가 조합해 만드는 것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실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들이 신기했는데, 전부 외우는 공식이어서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
김풍: "중학교 1학년때 드래곤볼을 패러디한 만화를 그렸다. 학교 선생님들을 등장시킨 만화였다."
김풍: "당시 영어 선생님 별명이 인간 수면제였다. 그래서 손오공, 베지타와 함께 천하제일무도회에 참가시켰는데, 무도 대회에서 영어 선생님은 계속 얻어맞으면서도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김풍: "결국 영어 선생님을 때리던 적은 졸음을 참지 못하고 쓰러지고, 영어 선생님이 승리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김풍: "당시 친구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친구들은 미친개나 과학 선생님도 등장시켜 달라는 등, 엄청난 호응이 있엇다."
김풍: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는 공부를 완전히 포기하고, 집에는 공부하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독서실에 가서는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김풍: "그런데 독서실 총무가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일러바치게 되면서, 한바탕 집안에서 난리가 났었다."
김풍: "그래서 대학을 포기하겠다는 편지를 썼는데, 아버지가 그걸 보자마자 편지를 찢어버리셨고, 난 바로 가출을 했다."
김풍: "그런데 그 때가 하필 고등학교 2학년 연말이어서 많이 추울 때였다. 반팔에 슬리퍼만 신고 나왔기에, 결국 반나절만에 집으로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김풍: "결국 부모님도 내 고집을 꺾지는 못하셨다. 고등학교 3학년 초부터 미술학원을 다니게 되었는데, 시간이 너무 없었다. 그래서 재수때 그림체를 바로 잡았고, 삼수를 하면서 실력을 향상시켜서 홍익대 애니메이션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참고로 김풍은 군대를 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김풍이 재수 삼수를 한 다음에 홍대로 진학을 했고, 2002년에는 바로 웹툰 폐인가족으로 데뷔를 했기 때문이죠.
김풍: "삼수생 시절에도 나이트 죽돌이였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인기가요를 녹화해서 신곡 안무를 외우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다."
김풍: "대학교 1학년때도 마찬가지였다. 강의실보다 나이트클럽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김풍: "대학 2학년 1학기 때 강남의 모 나이트클럽에서 열렸던 댄스경연대회에서 1등을 한 다음부터는, 이제는 정말 그림에 매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결국 김풍은 당시 인터넷 폐인들을 양산한다는 DC인사이드를 기반으로 활동을 했고, 거기 회원들을 소재로한 '폐인의 세계'를 연재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됩니다.
김풍: "내 만화를 올릴 때마다, DC인사이드 운영진들이 내 만화를 삭제했다. 글 올리는 게시판에 그림을 올리지 말라는 이유였다."
김풍: "당시에는 웹툰이라는 말도 없었다. 그래서 ‘폐인의 세계’ 습작만화를 올렸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그런데 그게 갑자기 없어졌다. 그래서 디씨에 물어봤더니 카툰 갤러리를 만들어주겠다고 하더라."
김풍: "사실 2002년 월드컵이 끝날 무렵이 완전 인터넷 문화의 중흥기였다. 당시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됐고, 사람들은 자기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많이 올리기 시작했다."
김풍: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의 참여형 콘텐츠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인터넷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디씨에서의 인기 덕분에 다음에서 김풍에게 제안을 했고, 결국 김풍은 강풀 등과 함께 2003년부터 다음에서 웹툰을 연재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의 인기 덕분에 김풍은 하나포스 CF에도 출연하게 되었죠. 당시 하나포스 CF에서 김풍은 "내 만화는 하나포스를 타고 흐른다"란 슬로건을 보여주었죠.
김풍: "당시 하나포스에서 온라인 상에서 뜬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박한별과 내가 뽑힌 것이다. 당시 박한별이 ‘인터넷 얼짱’으로 엄청나게 유명했다."
결국 폐인가족의 인기를 바탕으로 김풍은 캐릭터 회사까지 차리게 됩니다.
김풍: "그 시절 뽀로로는 ‘폐인가족’한텐 비교도 안 됐다. 싸이월드로부터 제안을 받고 미니홈피용 캐릭터를 파는 회사를 만들었다. 결국 월평균 매출이 10억원 정도 되었다."
김풍: "이때 번 돈으로 캐릭터 라이센싱 회사도 세우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사업가가 되면서, 학교도 중퇴하게 되었다."
결국 당시 인터넷 초창기때 폐인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김풍은 이를 재빨리 캐릭터화를 했기 때문에 큰 돈과 명성을 얻을 수가 있었죠.
그리고 한동안 끊었던 나이트클럽 대신에, 이번에는 클럽을 탐방하기 시작합니다.
김풍: "지금은 나이트는 안 간다. 클러버로 살고 있다."
(2004년 김풍 인터뷰에서)
김풍: "놀기 바빴고, 일하긴 싫었고, 클럽을 즐기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빠른 성공은 오랜 정체기를 불러왔다."
김풍: "당시 난 웹툰 작가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 그 대신에 캐릭터 회사 이사라고 하고 다녔다. 그냥 만화가보다는 캐릭터 회사 이사가 훨씬 멋있잖아."
김풍: "결국 인생의 단 맛을 너무 빨리 보게 되었던 것이다. 노력해서 성공했다기 보다 상황이 좋았다. 남들보다 한 발 먼저 웹툰을 시작했고, 캐릭터에 꽂혀 비지니스로 풀었던게 잘됐던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성공을 하기 전에, 김풍의 성공은 끝나고 맙니다. 시대의 흐름은 바뀌었고, 더 이상 폐인 캐릭터만으로는 세상에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죠.
김풍: "작가로서의 소명 의식이나 고뇌는 없었다. 만화를 그려야 캐릭터가 잘 되는데, 내가 너무 놀러다니기 바빠 캐릭터 개발을 안했다."
김풍: "결국 서른살이 되어서 캐릭터 회사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잡지에서 1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김풍: "그 다음에는 연극에 꽂혀서 극단에 들어갔다. 거기서 약 8개월간 연극배우로 활동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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